2009년 09월 21일
노부나가의 권력구조
(2) 노부나가信長의 권력구조
1. 노부나가 정권의 기반
노부나가의 권력기반은 제1단계에 있어서는, 오와리尾張, 미노美濃 지방이었으며, 제2단계에 있어서는, 오오미近江 지방이었다. 오와리 지방은 기소가와木曽川·나가라가와長良川·이비가와揖斐川 등의 유역에 걸친 충적층에 의해 형성된 곡창지대로, 교토京都 지방과의 교통도 상당히 번성했다. 교토와의 교통로로서는 오오미에서 스즈카산鈴鹿山을 넘어 이세伊勢로 나와, 구와나桑名에서부터 쓰시마津島에 걸친 도카이도東海道 외에, 미노를 지나 스노마타墨俣의 나루터(나룻배?)를 건너 오와리로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 특히 스즈카를 넘는 통로는, 오오미 상인이 오와리·미노의 산물을 반입하기 위해 빈번하게 이용했다.(주1) 그리고 그 물자들은 오오미의 시장(市庭)에서 판매된 것 외에도, 더욱이 교토에까지 널리 팔렸다. 이어서 15세기 중반쯤에는 비노尾濃 지방은 오오미 상인을 매개로 해서, 기나이畿内와의 사이에 상품의 유통권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것이 노부나가의 교토 진출을 용이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였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주1)
더욱이 에이로쿠(永禄, 1558~1569) 초반 오오미의 山越え商人(산을 넘는 상인?)이 이세를 넘는 길에서의 다른 상인의 통행을 금지하여 그 운반 상품을 압수했지만, 열거된 압수품목을 보면, 삼(麻の苧), 종이, 면(大綿), 자기(土の物), 소금, (油草), 미역, 김류, 대황, 이세포(伊勢布, 이세국에서 짜여져, 호나이保内 상인들에 의해 오오미近江나 교토京都에까지 운반된 무명), 마게모노(曲物, 노송나무·삼목 등의 얇은 판자를 구부려 쳇바퀴처럼 만든 원통에 바닥을 메운 그릇), 조류, 어류 등으로, 모두가 비노·이세 지방의 주요 산물으로, 이 상품들이 오오미 상인들에 의해 운반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와리 지방은 상품경제가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며, 이세에서 오와리로 향하는 배의 선착장으로서 쓰시마의 번영상은, 연가사連歌師 소쵸宗長가 1526(다이에이大永 6)년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수기에 의해서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마을에는 부호의 집이 많아, 부호의 집은 대부분 전당포를 운영하고 있었다. 쓰시마에서 동북 약 4km 정도 위치에 오다 노부나가의 초기 거성(居城) 쇼바타勝幡가 있어, 쓰시마는 노부나가의 소령(所領, 쇼료, 영주·지주에 의해 사유되어, 지배권이 행사되는 토지) 안이었다. 노부나가가 다이리(内裏, 고대 도성의 궁성 내 천황의 사적 구역)의 수리를 위해 4천 관(貫, 화폐 단위)이나 헌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경제적으로 풍족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노 지방에서는 상품 유통의 발달에 따라, 소령의 연공(年貢, 조세의 일종)도 화폐로 거둬져, 그를 바탕으로 소령의 크기를 관고(貫高, 토지의 수확량을 통화단위인 관으로 나타낸 것)로 나타내는 방법이 행해지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가신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는 노부나가로부터 처음에는 50관의 소령을 받았지만, 그 후 기요스清須에서 1정(町, 거리의 단위) 정도 떨어진 아라코荒子의 성주로 봉해져, 2400관을 지급받았다. 또 히데요시는 미노 공략에 공을 세워, 이 나라에서 300관의 소령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비해 오오미 지방은, 가모군蒲生郡의 호나이保内를 중심으로 하는 욘혼 상인(四本商人, 이세 지방에서 활동한 상인 집단)이나 고오자키군神崎郡의 고카 상인(五箇商人, 와카사若狭 지방에서 활동한 상인 집단)에 의해, 비노, 이세의 산물이나 와카사 방면의 물자가 반입되어, 국내의 각 시장(市庭)에서 널리 팔려 상품경제의 발달은 비노 지방보다도 한층 발전되어 있었다. 롯카쿠시六角氏의 간온지성觀音寺城의 쇼카세키시城下石寺의 신이치新市는 1540년대에 이미 라쿠이치(楽市,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각지의 센고쿠 다이묘 등에 의해 지배지의 시장에서 행해진 경제정책. 전매·독점을 금지하고 특권 연합, 조합들을 없애는 등 자유시장 체제를 도입하여 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로 지정되어, 호나이 상인이 거주하는 호나이쵸保内町가 설치되어 있었다.(주2) 더욱이 이 지방에서는 농민으로부터 연공을 화폐가 아닌 쌀로 수납하여, 영주는 필요한 화폐나 상품을 연공미를 매각하여 손에 넣고 있었다. 따라서 소령의 크기는 석고(石高, 근세 일본에서 토지의 생산성을 석石이라는 단위로 표현한 것)로 표시되고 있었지만, 그 석고도 연공의 양이 아닌 수확량을 나타낸 것이었다. 노부나가는 1568(에이로쿠永禄 11)년, 롯카쿠시의 옛 영토로부터 (指出)를 제출하게 하여, 다음 해 수확량의 1/3을 연공으로 하는 것을 정했지만, 이것은 아마 롯카쿠시 시대의 관행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으로, 이러한 연공의 징수법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서 수확량의 정확한 파악이 필요하여, 소령의 크기도 수확량으로 표시하는 방법이 합리적이었다. 노부나가는 1568년, 가신 리쓰다律田 가몬료(掃部助, 소부조, 관내성에 속하는 관직 이름)에게 롯카쿠시의 가신의 옛 영토를 합쳐 3500석을 주었지만, 이 석고가 수확량이라는 것은, 「영중방목록領中方目録」의 주인장(朱印状, 슈인죠, 전국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 발급된 주인朱印이 찍힌 명령 문서)에, 「지행(知行, 지교, 일본의 중세, 근세에 영주가 행사한 소령 지배권을 의미) 안에서 연공 배당 등 제반 사항 주고받음을 서로 하던 대로 할 것]이라고 적혀 있는 것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1. 노부나가 정권의 기반
노부나가의 권력기반은 제1단계에 있어서는, 오와리尾張, 미노美濃 지방이었으며, 제2단계에 있어서는, 오오미近江 지방이었다. 오와리 지방은 기소가와木曽川·나가라가와長良川·이비가와揖斐川 등의 유역에 걸친 충적층에 의해 형성된 곡창지대로, 교토京都 지방과의 교통도 상당히 번성했다. 교토와의 교통로로서는 오오미에서 스즈카산鈴鹿山을 넘어 이세伊勢로 나와, 구와나桑名에서부터 쓰시마津島에 걸친 도카이도東海道 외에, 미노를 지나 스노마타墨俣의 나루터(나룻배?)를 건너 오와리로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 특히 스즈카를 넘는 통로는, 오오미 상인이 오와리·미노의 산물을 반입하기 위해 빈번하게 이용했다.(주1) 그리고 그 물자들은 오오미의 시장(市庭)에서 판매된 것 외에도, 더욱이 교토에까지 널리 팔렸다. 이어서 15세기 중반쯤에는 비노尾濃 지방은 오오미 상인을 매개로 해서, 기나이畿内와의 사이에 상품의 유통권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것이 노부나가의 교토 진출을 용이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였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주1)
더욱이 에이로쿠(永禄, 1558~1569) 초반 오오미의 山越え商人(산을 넘는 상인?)이 이세를 넘는 길에서의 다른 상인의 통행을 금지하여 그 운반 상품을 압수했지만, 열거된 압수품목을 보면, 삼(麻の苧), 종이, 면(大綿), 자기(土の物), 소금, (油草), 미역, 김류, 대황, 이세포(伊勢布, 이세국에서 짜여져, 호나이保内 상인들에 의해 오오미近江나 교토京都에까지 운반된 무명), 마게모노(曲物, 노송나무·삼목 등의 얇은 판자를 구부려 쳇바퀴처럼 만든 원통에 바닥을 메운 그릇), 조류, 어류 등으로, 모두가 비노·이세 지방의 주요 산물으로, 이 상품들이 오오미 상인들에 의해 운반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와리 지방은 상품경제가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며, 이세에서 오와리로 향하는 배의 선착장으로서 쓰시마의 번영상은, 연가사連歌師 소쵸宗長가 1526(다이에이大永 6)년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수기에 의해서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마을에는 부호의 집이 많아, 부호의 집은 대부분 전당포를 운영하고 있었다. 쓰시마에서 동북 약 4km 정도 위치에 오다 노부나가의 초기 거성(居城) 쇼바타勝幡가 있어, 쓰시마는 노부나가의 소령(所領, 쇼료, 영주·지주에 의해 사유되어, 지배권이 행사되는 토지) 안이었다. 노부나가가 다이리(内裏, 고대 도성의 궁성 내 천황의 사적 구역)의 수리를 위해 4천 관(貫, 화폐 단위)이나 헌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경제적으로 풍족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노 지방에서는 상품 유통의 발달에 따라, 소령의 연공(年貢, 조세의 일종)도 화폐로 거둬져, 그를 바탕으로 소령의 크기를 관고(貫高, 토지의 수확량을 통화단위인 관으로 나타낸 것)로 나타내는 방법이 행해지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가신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는 노부나가로부터 처음에는 50관의 소령을 받았지만, 그 후 기요스清須에서 1정(町, 거리의 단위) 정도 떨어진 아라코荒子의 성주로 봉해져, 2400관을 지급받았다. 또 히데요시는 미노 공략에 공을 세워, 이 나라에서 300관의 소령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비해 오오미 지방은, 가모군蒲生郡의 호나이保内를 중심으로 하는 욘혼 상인(四本商人, 이세 지방에서 활동한 상인 집단)이나 고오자키군神崎郡의 고카 상인(五箇商人, 와카사若狭 지방에서 활동한 상인 집단)에 의해, 비노, 이세의 산물이나 와카사 방면의 물자가 반입되어, 국내의 각 시장(市庭)에서 널리 팔려 상품경제의 발달은 비노 지방보다도 한층 발전되어 있었다. 롯카쿠시六角氏의 간온지성觀音寺城의 쇼카세키시城下石寺의 신이치新市는 1540년대에 이미 라쿠이치(楽市,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각지의 센고쿠 다이묘 등에 의해 지배지의 시장에서 행해진 경제정책. 전매·독점을 금지하고 특권 연합, 조합들을 없애는 등 자유시장 체제를 도입하여 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로 지정되어, 호나이 상인이 거주하는 호나이쵸保内町가 설치되어 있었다.(주2) 더욱이 이 지방에서는 농민으로부터 연공을 화폐가 아닌 쌀로 수납하여, 영주는 필요한 화폐나 상품을 연공미를 매각하여 손에 넣고 있었다. 따라서 소령의 크기는 석고(石高, 근세 일본에서 토지의 생산성을 석石이라는 단위로 표현한 것)로 표시되고 있었지만, 그 석고도 연공의 양이 아닌 수확량을 나타낸 것이었다. 노부나가는 1568(에이로쿠永禄 11)년, 롯카쿠시의 옛 영토로부터 (指出)를 제출하게 하여, 다음 해 수확량의 1/3을 연공으로 하는 것을 정했지만, 이것은 아마 롯카쿠시 시대의 관행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으로, 이러한 연공의 징수법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서 수확량의 정확한 파악이 필요하여, 소령의 크기도 수확량으로 표시하는 방법이 합리적이었다. 노부나가는 1568년, 가신 리쓰다律田 가몬료(掃部助, 소부조, 관내성에 속하는 관직 이름)에게 롯카쿠시의 가신의 옛 영토를 합쳐 3500석을 주었지만, 이 석고가 수확량이라는 것은, 「영중방목록領中方目録」의 주인장(朱印状, 슈인죠, 전국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 발급된 주인朱印이 찍힌 명령 문서)에, 「지행(知行, 지교, 일본의 중세, 근세에 영주가 행사한 소령 지배권을 의미) 안에서 연공 배당 등 제반 사항 주고받음을 서로 하던 대로 할 것]이라고 적혀 있는 것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 by | 2009/09/21 22:18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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